드라마 닥터후에서, 주인공 닥터는 사탄을 찾기 위해 구덩이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1]

바닥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뿐인 미지의 구덩이로 뛰어들기 전에, 닥터는 공포가 아니라 내려가라 부추기는 ‘근질근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탐험대의 일원인 아이다는 그것을 두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urge to jump)’이라고 말하면서, 나무 타던 영장류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다음 나뭇가지에 점프해서 닿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감각이라 말한다.

하지만 닥터의 생각에 이런 부추김은 그런 것보다는 깊은, ‘추락하고 싶은 충동(urge to fall)’이라며 구덩이 속으로 뛰어든다.

‘추락하고 싶은 충동’을 처음 본 건 10년도 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아직도 되새긴다.

왜 유독 기억에 남을까? 이유조차 모르고 떠올렸던 장면인데,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혼자만의 작업에 심취한 후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요즘 내 취미는 알아차림이다. 우울이나 분노 같은 싫은 감정이 들면, 나는 즉시 내면에 외친다.

‘나는 이 감정을 놓아 보낸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면 평온해졌다. 만족감이 온몸에 퍼졌다. 그런데 만약 감정을 알아차리기 전부터 항상 놓아 보낸 채로 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고요하지만 공허하지 않고, 편안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한결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까?

육아로 고단해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날, 갑자기 꽃말이 ‘자유’인 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검색해 보니 ‘참제비고깔’이라는 꽃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꽃이 ‘4월 19일’의 탄생화라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첫째가 태어난 지 100일이 넘었을 때부터 둘째가 뛰어다니는 최근까지, 한 달에 한 번은 4.19 민주묘지를 산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60년 4.19 혁명 때 희생된 민주열사들을 모신 곳이다.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과 찾기 좋은 곳이다.

광장에서 아이들과 무지갯빛 비눗방울을 후- 불며, 기념관에 전시된 조상들의 행적을 추적하며, 봉안소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조상들의 얼굴, 그중에서도 야무진 소년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아이들과의 추억을 켜켜이 쌓아 나갔다. 아이들의 무의식에 그들이 부르짖던 혁명이 아로새겨 지길 바랐다. 그래서 엄마가 된 후로 4월 19일은, 생일처럼 의미 있는 숫자가 됐다.

4월 19일과 친해진 나는, 그토록 원했던 자유가 실은 오래전부터 곁에 머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유와 가까웠는데도 지구 밖으로 나가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아파트 10층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 상상하던 이전의 나에게도, 유모차를 끌며 ‘내가 떠나면 아이들은 슬퍼할까.’ 상상하는 지금의 나에게도, 자유로 들어가는 문이 항상 열려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유는 태어날 때부터 살갗보다 가까이 있어왔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닿을 수 있었던 걸까.

‘추락하고 싶은 충동’을 기억하는 것은 깊이 숨어있던 나의 부추김이었나. 근심을 놓아 보내고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다는, 그 상태에 머물러서 궁극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아니면 <그리스인 조르바>에 쓰여있듯,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내가 찾았다고 생각하는 이 자유란 것이 여기서 말하는 그 '사슬'일지도.

나는 이 깨달음의 바다가 자유로 향하는 길인지, 뇌라는 화학 공장이 멋대로 지어낸 워터파크에 불과한지, 이번 삶을 통해 검증해 보려 한다.

어떤 삶을 살든, 나는 이 생에 기쁘게 뛰어들 것이다.

[1] 닥터후 시즌2, 9회, The Satan Pit

#31 Take the div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