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미로를 만들었다. 출구에는 꿈을 모두 이룬 나를 세워 두고, 출발선에는 꾀죄죄한 내가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삑- 스톱워치의 숫자는 0에서 무한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고3,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출구가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벽에 부딪쳤다. 재미없었고, 재미없는 일을 꾸준히 할 힘도 없었다. 꾀죄죄한 나는 미로의 벽에서 한참을 주저앉았다. 출구는 보이지 않고, 일어나 다른 길을 찾기는 힘들고, 마블 히어로처럼 능력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눈앞의 벽을 부숴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출구에 있는 나는 싫은 일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반드시 해 내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꾀죄죄한 나는 초라하다. 출구의 위치는 물론이고, 존재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이럴 때, 당신은 쉬다가 일어나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탈출하기 위해 지도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벽 앞에 선 고3의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벽에 대고 발길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계란이었고, 나를 힘들게 하는 벽은 바위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계획표에 적어 놓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늦게 일어났다거나, 쉴 때 잠깐 보겠다던 드라마로 일과를 마무리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남들처럼 작심삼일도 아니고, 하루 만에 무너졌다. 출구에 서 있는 내가 비웃었다. 독한 년이 되고 싶었는데, 그냥 게으른 년이었다. 이렇게 형편없는 내가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결심을 하고, 계획을 세우다가, 잘 안 풀리면 벽에다 스스로를 통째로 짓이겼다. 머리를 찧으며 벽에 대고 소리쳤다.

“왜 나는 항상 이 모양이야, 왜!”

질책은 바위에 부딪치고는 반사되어 소리 질렀던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는 소리 없는 벽에 대고 대답이 없다며 울분을 쏟아 냈다. 십수 년을 소리치다, 이윽고 목이 쉬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해졌다.

 

시끄러운 비난을 멈추자 미로에 고요가 깃들었다. 고요가 찾아온 후, 미로에 낯선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선택해.”

음성이 고요한 마음의 수면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가 처음 미로를 만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출구를, 그다음은 미로를, 꾀죄죄한 나를 만들던 순간이 차례로 기억났다. 나는 입구이자 미로이고, 출구였다.

 

벽을 바라보았다.

‘여기다 대고 소리치는 게 출구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될까? 여태까지는 아니었다면, 이러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벽에 대고 울부짖는 역할, 출구가 없는 것 같은 미로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역할. 무엇을 맡을지. 이제 ‘원하는 나’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나는 ‘즐거운 나’를 선택할 지혜가 생겼다.

목표도, 과정도, 계획도 모두가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벽에 대고 괴로워하는 나도, 구불구불한 길을 지도에 의지해 탐험하는 나도, 출구에 서있는 나도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미로 전체를 파괴할 힘까지 있었다.

“선택해.”

낯선 음성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발만 동동거리며 원망하던 벽을 미련 없이 떠났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십수 년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얼마든지 새로운 길을 찾을 시간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을 허송세월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는데, 왜 그걸 잊고 살았을까? 어떻게 거기 서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수가 있지?’

벽 앞에 버렸던 자괴감이라는 허물이 길을 떠난 후에도, 머릿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도 지난날의 멍청한 내가 미웠다. 과거의 내가 생각날 때면, 후회가 늪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과거의 나를 미워하고 있으면, 낯선 음성이 다시금 나타나 제지한다.

“선택해.”

 

그래, 지난 세월 동안 자책은 충분히 해봤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이 미로를 탈출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현재의 나는 정신승리를 밧줄 삼아 늪을 벗어난다. 후회나 자괴감보다는 이런 정신승리가 탈출에 도움이 됐다.

‘그땐, 선택하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을 거라는걸, 몰랐을 뿐이야. 이제는 다르게 대처하자.’

‘그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서 도움이 되는 일도 있을 거야. 한심했던 순간도 쓸모 있을 때가 있을 거야.’

‘그때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하면 무슨 마음인지 알잖아. 나는 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안아줄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나를 용서할래.

나만은 나를 용서하기를 선택할래.

 

나는 벽에서 울부짖던 너를 용서할래.

나만은 너를 알아주기를 선택할래.

너를 힘들게 하는 그 일이

왜 생겼는지 불평하기보단,

감상평을 좋게 남겨보자.

나쁜 일도 좋았고, 좋은 일도 좋았어.

“설계자로 살기를 선택해.”

#11 Stone Heart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