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버벅댄다. 주인공이 되어 칭찬을 받고 싶지만, 그만큼 따라오는 사람들의 비난이 무섭다. 내가 실은 허술한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 간파할까 봐 경계하게 된다.

그런 나에게 2시간이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결혼식이다.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 서둘러 결혼해야 했다. 4개월 만에 임신 소식 알리기, 상견례, 결혼식, 신혼여행까지 끝냈다. 사람은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된다.

결혼식에서 예식장, 드레스, 부케로, 커플들은 그들의 안목을 선보인다. 얼마나 예쁘고 행복하고 완벽한지 발표하는, 인생에 웬만하면 단 하루인 날.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부터 밥 먹으려고 앉을 때까지, 숨 쉬는 법도 걷는 법도 까먹을 만큼 긴장했다.

평생을 자신감에 찬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유롭고 차분한 사람, 어떤 순간에도 초연한 사람.

하지만 그런 것을 갈망하면 할수록, 나는 산들바람처럼 작은 변화에도, 태풍을 맞은 듯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

<닥터후>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닥터가 이런 말을 했다. - 이 드라마는 앞으로 두 번 더 언급할 예정이다. -

“무섭다는 거 알아. 하지만 무섭다는 건 괜찮은 거야. 두려움은 초능력이라는 말 들어본 적 없니? 두려움은 널 더 빠르게 만들고, 더 똑똑하게,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1]

두려움은 쓸모없는 감정이라 여겼고,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한 얼굴을 연기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왔던 나는, 주인공에게 딱밤을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너무 긴장돼서 결혼식 내내 힘든 줄 몰랐던 일, 대학 전공 수업에서 발표를 맡았을 때, 10분만 서있어도 다리가 아팠던 내가, 1시간 내내 서있는데 아무렇지 않았던 일도 생각났다.

어쩌면 긴장, 공포, 분노 같은 다른 싫은 감정들도, 관점만 바꾸면 나를 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서운 감정들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 몸이 위기에 빨리 대응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부여하기 위해 생겨난 감정일지도 모른다.

날뛰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라보는 것조차 커다란 자극이어서 외면해왔던 아픈 감정들.

길들이기는 힘들지만, 다룰 수만 있으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야생마 같은 감정. 이제는 이 질주하는 힘을 타고 원하는 곳으로 떠날 것이다.

…

제주 어느 통나무집의 계단을 오르면, 하얀 커튼이 나풀거리는 틈으로 테라스가 드러난다. 테라스 왼쪽에 놓인 고동색 통나무 의자 2개. 그중 하나에 둔각으로 기대어 앉은 나와, 무릎 위의 아기. 흐린 구름이 모여 앉은 날. 바다의 지평선과 하늘과의 희끄무레한 경계, 전깃줄 위를 썰매 타듯 미끄러지는 빗방울들. 까만 돌담, 녹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야자수.

비스듬히 내리는 비에 무릎이 축축해져도, 맑은 날 여행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씻겨주는, 시원한 바람과 비가 좋다.

추모공원에서 엄마의 발인을 하던 날 내리던 굵은 빗줄기와 성분은 똑같을 텐데. 어떤 기억이 젖어 있는지에 따라, 기분 좋게 시원할 때도 있고, 세상도 나처럼 울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기쁜 날, 슬픈 날, 화나는 날. 시시때때로 비가 내릴 것이다. 당신이 어떤 비를 맞이하더라도 사이사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날의 감정을 받아줬으면 좋겠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도, 스스로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1] 닥터후 시즌 8, 4회, Listen